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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왜 싸우는가, 전쟁 배경

by 잔지바르 2023.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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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디지털투데이)

2023. 10. 7.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기반으로 하는 이슬람 무장 정권 하마스는 이스라엘 남부지역을, 하마스와 연대한 레바논 무장 정권 헤즈볼라는 이스라엘 북부 지역을 공습했습니다. 이에 이스라엘은 전쟁을 선포하며 즉각적인 보복 공격에 나섰습니다.


예전부터 중동의 화약고로 불리며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과의 갈등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이팔전쟁)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우선 팔레스타인 지역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의 역사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지역을 자신들의 국가라 주장하는 근거를 알기 위해서는 기원전 13세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구약성서에 따르면 기원전 13세기 전 이집트의 노예 생활을 하던 히브리인들의 인구가 많아지자 이집트의 왕인 파라오는 히브리인들이 적들과 동맹하여 이집트에 대항할 것을 염려해 히브리인들의 소년들을 죽이라 명합니다.

 

이에 모세의 어머니는 학살을 피해 모세를 바구니에 넣어 나일강에 띄워 보내게 됩니다. 마침 모세는 나일강에서 목욕을 하던 이집트 공주에 의해 발견되었고, 공주에 의해 입양된 모세는 이집트 왕실에서 자라게 됩니다.

 

하지만 훗날 자신도 히브리인이란 것을 알게 된 모세는 이집트에서 핍박받던 히브리인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그들을 데리고 가나안이라 불리던 동부 지중해 연안인 현재의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가게 됩니다.

 

이집트를 떠나 가나안으로 가던 도중 히브리인들을 죽이기 위해 이집트의 군대가 쫓아왔고, 앞은 홍해로 막혀있는 상황에서 모세가 지팡이를 바닥에 내려치자 홍해가 갈라졌다는 '모세의 기적'은 구약성서에 유명한 일화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유대인들은 가나안(지금의 팔레스타인 지역)을 자신들의 땅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죽은 후 후계자는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지휘하여 가나안 일대를 침략해 정복했으며, 기원전 10세기 경엔 다윗 왕과 솔로몬 왕의 시대로 이스라엘 왕국의 전성기를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솔로몬 왕이 죽은 후 가나안 지역은 이스라엘 왕국과 유다 왕국으로 분열되었고, 결국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에 의한 패망과 로마 제국으로부터의 독립 전쟁 실패로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땅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흩어지게 됩니다.

 

이후 팔레스타인 지역은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았으나 13세기에 등장한 오스만 제국의 세력 확장으로 1516년에는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지역이 점령되어 오스만 제국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약 400년간 지배하게 됩니다.

이슬람을 국교로 하는 오스만 제국과 주변의 대부분 국가들이 이슬람 국가였기 때문에 팔레스타인 지역 역시 자연스럽게 이슬람 문화가 자리 잡게 됩니다.

 

드레퓌스 사건

드레퓌스(왼쪽)와 헤르츨(오른쪽)

 

1870년 통일 독일을 이룩하려는 프로이센과 이를 저지하려는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발생하게 됩니다. 결국 1년 만에 프랑스의 패배로 양국은 휴전 협정을 체결하고 독일 제국이 탄생하게 됩니다.

 

전쟁의 패배로 인해 프랑스에서는 독일에 대한 반감이 높아졌으며, 더불어 유럽 전역에서 민족주의가 팽배해져 반유대주의가 극심해지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1894년 9월 프랑스 정보 요원이 파리의 독일 대사관에서 몰래 빼내온 문서를 통해 프랑스군 내부에 프랑스의 군사 기밀을 독일로 유출시킨 간첩행위자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됩니다.  이에 수사를 진행하던 프랑스 당국은 문서의 필체가 육군 참모본부에서 근무 중인 육군 포병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의 필체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그를 범인으로 지목하게 됩니다.

 

반독일, 반유대 감정이 팽배했던 프랑스에서 드레퓌스가 독일계 유대인이라는 것은 그의 혐의를 더욱 짙어지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고 결국 그는 재판에 회부되어 종신 유배형에 처해지게 됩니다.

 

그러나 2년 뒤인 1896년 프랑스 참모본부 정보국의 조르주 피카르 중령은 다른 간첩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진범인 에스테라지 소령을 적발하게 되었고 이를 참모본부 상부에 알려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하며 재판이 다시 열리게 되었으나 재판에서 진범인 에스테라지 소령은 무죄로 풀려나게 됩니다. 

 

1860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출생한 테오도르 헤르츨은 오스트리아 빈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신문기자 겸 작가로 활동하던 중 프랑스 파리에 특파원으로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드레퓌스 사건을 목격하게 됩니다.

 

당시 오스트리아 내에 만연했던 반유대주의에 시달리다가 프랑스에 오게 된 헤르츨은 혁명의 본고장으로 차별과 억압을 반대하는 프랑스에서조차 반유대주의가 팽배한 것을 목격하게 되고, 유대인의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이후 유대인들 조상의 땅이라 여기는, 당시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던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 국가 건설을 목적으로 하는 민족주의 운동인 시온주의 협회를  창설하게 됩니다. 참고로 시온은 예루살렘의 작은 언덕을 뜻합니다.

 

시온주의 협회를 통해 시온주의자들은 1901년 유대민족기금을 설립하여 모금된 자금으로 텔아비브 주변의 토지를 매입하여 점진적으로 유대인들을 이주시키게 됩니다.

 

제1차 세계 대전

출처: 지식해적단(유튜브)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게 되었고, 19세기부터 국운이 기울던 오스만 제국은 이를 타계하기 위해 독일의 편에 서서 1차 대전에 참전하게 됩니다. 이에 영국은 오스만 제국을 견제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 통치하에 있던 아랍 국가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당시 영국은 이집트 주재 영국 고등 판무관 헨리 맥마흔을 통해 메카와 메디나 지역 일대를 통치하던 하심 가문(현재 요르단 왕가)에  편지를 보내 오스만 제국의 영토인 팔레스타인 지역을 포함하여 통일 아랍 국가를 건설해 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협력을 요청하게 됩니다. 이를 후세인-맥마흔 서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프랑스와는 전후 아랍 지역을 둘이 나누자는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체결하고, 영국의  외무장관 아서 벨푸어는 유대인에게 전쟁 자금 지원을 대가로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의 나라를 세워주겠다는 벨푸어 선언까지 하게 됩니다.

 

아랍 왕국 설립이 간절했던 하심 가문은 영국의 제안을 받아들여 1916년 오스만 제국에 대한 반란을 일으켜  메카와 메디나 지역을 장악하고 헤자즈 왕국으로 독립한 뒤 북상하여 1918년 예루살렘까지 입성하게 됩니다.

 

1차 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고 영국은 가장 먼저 프랑스와 오스만 제국 영토를 나눠 갖게 됩니다.

그리고 하심 가문과의 약속을 어기고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들을 이주시킵니다. 그러나 하심 가문 역시 나머지 영토라도 가져야 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지역 이주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1919년 파리강화회의 이후 영국은 하심 가문에게 요르단 강 동쪽과 이라크에 대한 통치권을 주고 요르단강 서쪽 지역인 팔레스타인 지역을 영국 직할령으로 하여 직접 통치하게 됩니다. 그리고 팔레스타인 지역 책임자로 시온주의자인 허버트 사무엘을 임명하였고, 그는 유대인들의 정착촌을 늘려갔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1차 대전의 패배로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물게 된 독일의 불만이 쌓여갔고, 게르만 민족의 부흥을 외치며 나치가 집권을 하게 되며 또다시 유대인들을 탄압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팔레스타인 지역의 유대인 이민자는 폭증하였고 기존에 거주하고 있던 아랍인들과의 갈등이 점점 커지게 됩니다. 

 

그러던 중 1936년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아민 알 후세이니의 주도 하에 아랍인들의 대규모 반란 사태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런데 영국이 아랍인들의 저항 조직은 불법화시키고, 유대인들에게는 군사 훈련과 무기 지원을 하는 등 한쪽 편만 들게 됩니다.   

 

그런데 1939년에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아랍인들의 도움이 필요했던 영국은 반대로 유대인들의 이주를 제한함과 동시에 토지 매입까지 규제하게 시작합니다. 배신감을 느낀 유대인들은 영국을 상대로 테러를 일으키는 등 영국과의 관계가 악화되게 됩니다.

 

아랍인과 유대인 모두에게 신뢰를 잃은 영국은 팔레스타인 문제를 UN에 떠넘기고 되고, 이 문제를 떠맡게 된 UN은 1947년 팔레스타인 지역을 나누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국가를 만드는 '팔레스타인 분할 안'을 통과시키게 됩니다.

 

지중해 쪽 해안가 상당 부분과 홍해 지역 모두는 이스라엘이 차지하고, 성지인 예루살렘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둘러 쌓여있어 유대인과 아랍인들 양쪽 모두 만족하지 못한 분할로, 유대인은 이를 받아들였지만 아랍 측의 거부로 실행되지 못하게 됩니다. 

 

출처: 현재(왼쪽)와 UN이 제안한 팔레스타인 지역(오른쪽)-비엣청

 

제1차 중동 전쟁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1948년 영국이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철수하게 되고, 무정부 상태가 된 팔레스타인 지역의 요충지를 선점하기 위해 유대인과 아랍인의 무력 충돌은 더욱 치열해지게 됩니다.

 

그러던 중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총리 다비드 벤구리온이 텔아비브 미술관에서 이스라엘의 건국을 선언하자 이집트의 폭격을 시작으로 제1차 중동 전쟁이 시작되게 됩니다.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5개국의 아랍 연합국에 비해 무기와 군대가 턱없이 부족했던 이스라엘은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처절한 항쟁을 통해 20일을 버티며 예루살렘과 텔아비브를 지켜내게 됩니다. 

 

이후 스웨덴의 중재로 아랍과 이스라엘의 평화협적이 진행되며 휴전이 되자, 유럽과 미국에 있던 유대인들이 다량의 무기와 군수품을 이스라엘로 보내게 되고 짧은 시간에 현대 무기로 무장한 이스라엘은 평화 협상이 타결되기 전 아랍 국가들에 대한 선제 타격으로 제공권을 장악하고 탱크를 앞세워 아랍 국가의 영토를 정복해 나가게 됩니다.

 

1949년 2월 이집트에서 평화 조약이 체결되며 이스라엘은 세계 여러 나라들로부터 국가로 인정받게 되었고 최초 건국 때의 2배에 이르는 영토를 차지하게 됩니다.

 

제2차 중동 전쟁

1956년 7월 26일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은 서방측의 지원을 받아 아스완 댐을 건설하고, 소련으로부터는 무기를 도입하려는 이중적인 외교 전략을 취하게 됩니다.

 

하지만, 서방측은 소련 무기 도입을 문제로 아스완 댐 건설 비용 지원을 거부했고, 이에 나세르 대통령은 아스완 댐 건설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그동안 영국과 프랑스에서 통행세를 받고 있던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하게 됩니다. 

 

이에 영국과 프랑스는 이집트와 앙숙 관계에 있던 이스라엘과 동맹을 맺고 전격적으로 이집트를 침공하게 되는 제2차 중동 전쟁이 발발하게 됩니다. 

 

제1차 중동 전쟁 후에 국방력이 비약적으로 성장한 이스라엘은 홀로 수에즈 운하뿐 아니라 이집트 시나위 반도의 대부분을 점령하였고, 영국과 프랑스 군의 합세로 이집트는 3면에서 공격을 받게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하지만, 당시 냉전 시대였던 만큼 소련은 서방측에 대항하는 이집트를 지원하며 영국과 프랑스를 향해 이집트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핵공격도 불사할 수 있음을 경고하였고, 미국 또한, 영국과 프랑스가 제국주의를 버리지 못하고 식민 정책을 유지하기 위해 일으킨 전쟁으로 비치는 이번 전쟁이 도덕적 정당성이 부족한 데다, 자칫 전 아랍권이 공산 국가와 손을 잡을 수 있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었기에 영국, 프랑스 및 이스라엘에 압박을 가하기 시작합니다. 

 

미국과 소련이라는 초강대국들의 압박으로 결국 영국과 프랑스 군대는 철수하였고,  얼마 후 이스라엘 군도 시나위 반도에서 철수하며 수에즈 운하와 시나위 반도는 다시 이집트의 손에 들어가며 제2차 중동 전쟁은 끝나게 됩니다.

 

제3차 중동 전쟁

1, 2차 중동 전쟁 후 이스라엘과 주변 아랍국가 사이에 긴장은 고조되어 있었으며, 1967년 이집트가 티란 해협을 봉쇄하여 이스라엘 선박의 홍해 진입을 막겠다는 선언과 함께 이스라엘 국경에 군대를 배치하게 됩니다.

 

그러자 1967년 6월 5일 이스라엘은 예방적 선제공격이라는 명분하에 이집트 공군 기지를 폭격하며 제3차 중동 전쟁이 발발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계속하여 가자지구와 시나위 반도로 진군하였고, 이집트의 요청에 따라 요르단과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공격했으나 대패하여 6월 11일에 휴전 협정이 체결되게 됩니다.

 

제3차 중동 전쟁은 6일이라는 짧은 기간에 끝났으나 이스라엘은 이집트로부터 가자 지구와 시나위 반도를, 요르단으로부터 동예루살렘과 요르단 강 서안 지구를, 시리아로부터는 골란 고원을 획득하여 영토가 3배나 커지게 됩니다.

 

제4차 중동 전쟁

3차 중동 전쟁으로 시나이 반도와 골란 고원을 점령한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시리아에게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할 것과 항구적인 평화 협정 체결, 두 지역의 비무장지대화를 조건으로 이 지역들을 반환하는 것을 비밀리에 제안했으나, 단박에 거절당하게 됩니다.

 

이에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와 골란 고원을 자국의 영토로 합병하는 절차에 착수했고, 이에 반발한 이집트는 시나이 반도 반환과 이 지역에서 이스라엘 군 철수를 요구하며 소련의 지원을 받아 이스라엘과 수에즈 운하 일대에서 무력 충돌을 벌이게 됩니다.

 

양국은 3년이 넘는 기간 동안 국지전을 이어갔고, 결국 1970년 8월 휴전 협정이 타결되며 전쟁이 끝을 맺었으나 수에즈 운하에서 한 치의 양보 없이 대치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집트는 3년 넘게 이어온 소모전과 수요 수입원이었던 수에즈 운하가 폐쇄되며 경제적으로 막대한 손실을 입고 있었으며, 이스라엘 역시 지속적 소모전으로 인한 부담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1970년 9월 28일 이집트 대통령인 가말 압델 나세르가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사망하였고, 뒤를 이어 이집트 대통령에 오른 안와르 사다트는 나세르와는 다른 행보를 보이게 됩니다. 

 

아랍국가들의 단결을 도모하면서도 이전과 다르게 서방에 우호적인 자세를 취하였으며,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시나위 반도의 일괄 반환을 요구했던 나세르와 달리 폐쇄된 수에즈 운하의 정상화가 우선이라 판단하여 수에즈 운하로부터 20마일(약 32km) 뒤로 물러날 것을 제안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6마일(약 10km) 이상은 물러날 수 없다고 대응하며, 우선 협상장을 열고 양국이 조건을 조율할 것을 제안하였지만, 협상장에서 이스라엘 대표를 만나는 것은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는 것이라 판단한 사다트 정부는 이 제안을 거절하게 됩니다.

 

한편으로 사다트는 구식대적인 정부 조직의 개혁을 위한 시도도 단행하게 되는데, 우선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원인이 군대의 체질과 훈련 강도에 있다고 판단하여 소련으로부터 최신 병기들과 군사 고문단을 초빙하여 군대 체질 개선과 체계적인 훈련을 통한 국방 개혁에 심혈을 기울이게 됩니다.

 

이렇게 국방력을 키운 이집트는 1973년 10월 6일 이스라엘의 최대 명절인 욤키푸르 당일에 경계가 느슨해진 틈을 이용하여 시리아와 연합하여 동시 다발적인 기습을 시작하며 제4차 중동 전쟁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전의 중동 전쟁과 달리 강력한 국방력을 갖춘 이집트는 욤키푸르 일을 맞아 많은 군인들이 휴가를 떠나 병력 공백이 있었던 이스라엘 군을 초기에 제압하며 궁지로 몰아가게 됩니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자국의 핵미사일 제리코 1을 사용할 계획을 세우고, 이집트 또한 소련으로부터 지원받은 핵탄두 탑재가 가능한 스커드 미사일로 반격할 준비를 하는 등 핵전쟁으로 확전 될 양상을 보이자 UN이 중재에 나서며 가까스로 전쟁이 종결되게 됩니다.

 

이전의 전쟁과 달리 4차 전쟁에서 이집트가 선전하긴 했으나 지금까지의 전쟁을 겪으며 이스라엘을 무력으로 제압할 수 없음을 판단한 이집트는 평화 정책으로 외교노선을 변경했고, 협상 끝에 수에즈 운하를 재개통하게 됩니다. 또한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의 중재로 이집트는 이스라엘과의 협상을 통해 시나위 반도를 반환받게 됩니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파타, 하마스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들의 이주가 늘어남에 따라 기존에 거주하고 있던 아랍인들의 저항이 거세졌고 서로 간에 분쟁이 많아지게 되자, 1964년 이집트에서 아랍 연맹 정상회의가 열렸고 팔레스타인 지역의 아랍인들의 해방과 독립을 이룩하겠다는 의지로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탄생하게 됩니다.

 

중동 전쟁을 거치며 팔레스타인 지역이 이스라엘에 점령당하자, 이스라엘에 대한 아랍 주민들의 분노가 끓어오르기 시작했고 요르단에 거점을 둔 PLO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목표로 무장 투쟁을 선언하며 이스라엘을 상대로 테러와 게릴라전을 펼치게 됩니다. 

 

이에 맞서 이스라엘은 PLO 제거를 명분으로 PLO의 거점 장소인 요르단을 공격하였고, 이에 위협을 느낀 요르단 국왕은 1970년 9월  PLO를 무력으로 추방시키게 됩니다. 요르단과의 무력 충돌로 인해 PLO는 많은 조직원들을 잃게 되었고, 거점 지역을 레바논으로 옮기게 됩니다.

 

레바논으로 거점을 옮긴 PLO는 같은 아랍계 국가인 요르단의 공격에 대한 강산 배신감을 느꼈고, '검은9월단'이라는 과격무장단체를 조직하여 요르단 총리를 암살하는 등 각종 테러를 감행하게 됩니다.

 

가장 잘 알려진 것으로 1972년 뮌헨올림픽 당시 이스라엘 선수촌을 습격하여 이스라엘 선수들을 납치 및 살해한 사건이 있는데, 이 사건으로 PLO는 국제 사회의 맹비난을 받게 되자 이스라엘 외 국제 테러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며 이스라엘과의 유격전에만 몰두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1982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으로 인해 튀니지로 거점을 옮겨 저항을 지속하다, 1988년 팔레스타인의 독립국가 수립을 선포하며 이스라엘을 인정하고, 1992년에는 '오슬로 협약'을 통해 이스라엘과 화친을 맺는 등 온건 노선으로 방향을 바꿔 자치정부로서 요르단 강 서안 지구(west bank)와 가자 지구의 통치권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2년 후 '오슬로 협정'을 주도했던 이스라엘 총리가 암살당하고, 협정 반대파인 베냐민 네타냐후가 총리에 취임하게 되자 다시 아랍인들에 대한 압박이 시작되었고, 온건파에 대한 아랍인들의 불만이 쌓여 과격 정당인 '하마스'가 등장하게 됩니다.   

 

하마스의 등장으로 팔레스타인해방기구( PLO)는 온건파인 '파타' 정당과 과격파인 '하마스' 정당으로 나뉘었으며, 요르단 강 서안 지구(west bank)는 온건파인 '파타' 정당이 집권하였고, 가자 지구에는 과격파인 '하마스' 정당이 집권하여 이스라엘에 대한 끊임없는 무력 투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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