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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폭탄 개발의 기원, 맨해튼 프로젝트, 핵확산금지조약(NPT)

by 잔지바르 2023. 8.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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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폭탄 개발의 기원

원자핵 분열을 통해 폭탄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1903년 영국의 물리학자 어니스트 러더퍼드와 프레더릭 소디에 의해 처음으로 제기되었습니다. 원자핵이 분열할 때 방출되는 엄청난 에너지의 가능성을 제시하며, 이를 활용하여 강력한 무기를 개발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하지만 큰 관심을 받지 못했고,, 이 아이디어는 잠시 뒷전으로 밀려나게 됩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의 발발로 인해 원자핵 분열의 무기화가 다시 주목받게 됩니다. 1938, 독일 과학자들은 방사성 물질인 우라늄에 중성자를 충돌시키는 연쇄 핵분열 반응 실험을 성공하게 되고, 이를 통해 나치 독일은 우라늄을 획득하여 핵폭탄 개발을 추진하게 됩니다.

 

이에 위기감을 느끼고 1939 8, 실라르드 레오와 유진 위그너라는 물리학자들이 아인슈타인을 찾아가 아인슈타인-실라르드 편지로 알려진 '독일의 핵폭탄 개발 위험성'을 경고하는 문서의 초안을 작성하게 됩니다. 이 문서는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새로운 유형의 폭탄이 나치 독일에 의해 개발될 수 있는 가능성과 독일보다 먼저 폭탄을 개발해야 한다는 내용을 언급하였고,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서명을 받아 당시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이 제안은 미국 정부에 의해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에 따라 국가 방위 연구 위원회(NDRC) 설립을 명령하였고, 이 위원회는 우라늄 및 플루토늄을 추출하고 발견하기 위한 연구를 수행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과학 연구 개발 사무소(OSRD)가 설립되었고, 이 사무소의 소장으로는 버니바 부시가 임명되었습니다. 그 후 S-1 우라늄 위원회로 이름이 변경된 위원회는 핵무기 연구 및 개발을 주도하게 됩니다.

맨해튼 프로젝트

1941 10 9, 미국에서는 루스벨트 대통령과 부통령 헨리 웰러스, 그리고 버니바 부시가 회의를 갖고 원자 폭탄 개발을 진행하기로 결정하게 됩니다. 이에 따라 원자 폭탄의 개발은 미육군의 주도 하에 진행되게 되었고, 또한 영국의 윈스턴 처칠 수상에게 협력 의사를 전달하는 등 국제적 협력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것이 맨해튼 프로젝트입니다.

 

맨해튼 프로젝트는 미국을 주도로 하고 영국과 캐나다가 참여한 협력 프로그램으로, 2차 세계대전 중에 핵무기를 개발하는 데 목표를 둔 혁신적인 프로젝트였습니다. 대령 레슬리 그로브스의 지휘하에 1942년부터 1946년까지 미국 육군 공병대가 프로젝트를 감독했습니다. 이 프로젝트의 군사 부문은 맨해튼의 브로드웨이에서 진행되었습니다. 맨해튼 프로젝트는 대외적 이름은 '대체 자원 개발'이었으며, '맨해튼 프로젝트'는 미국의 암호명이고, 영국 측 참가 조직의 암호명은 '튜브 앨로이스'였습니다.

 

맨해튼 프로젝트는 1939년에 매우 제한된 자원으로 시작되었지만, 1945년에는 13만 명 이상의 인력과 약 20억 달러(2020년 화폐 가치에 대입하면 약 230억 달러)의 예산을 동원하는 대규모로 성장했습니다. 비용의 90% 이상은 공장 건설과 핵분열 원료 구입에 사용되었고, 10% 정도는 무기 개발에 사용되었습니다. 연구 개발 및 제조는 미국, 영국, 캐나다 등 30곳 이상의 지역에서 분산되어 이루어졌으며, 일부 지역은 극비에 부쳐졌습니다.

 

전쟁 기간 동안 두 종류의 핵폭탄이 개발되었습니다. 첫 번 째 핵폭탄은 탄두로 우라늄-235를 사용한 "총형" 핵분열 무기로 이는 자연에 존재하는 우라늄 중 0.7%를 차지하는 우라늄-235를 농축하여 탄두를 만든 것이고, 다른 하나는 탄두로 플루토늄을 사용한 것이었습니다. 핵폭탄의 설계 및 생산은 뉴멕시코주의 로스앨러모스 연구소가 주관했으며, 당시 연구소의 소장은 물리학자인 J. 로버트 오펜하이머였습니다.

 

1945716일에는 세계 최초의 핵폭발인 트리니티 실험이 성공했습니다. 오펜하이머는 핵 구름이 하늘로 치솟자 힌두교의 경전에 있는 말, “나는 죽음이다, 세상을 파괴하는 자다”라는 구절이 생각났다고 회상했습니다. 이후 "리틀 보이"라는 이름의 우라늄-235 폭탄과 "팻 맨"이라는 이름의 플루토늄 폭탄이 개발되었고, 이들 폭탄은 각각 194586일과 89일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되었습니다.

 

맨해튼 프로젝트는 핵무기 제조가 주된 목표였지만, 방사능의 의학적 활용이나 핵추진력을 활용한 해군력 확보와 같은 다양한 방사선학적 응용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1947년에 맨해튼 프로젝트의 업무는 미국 원자력 위원회로 이관되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세계사에서 중요한 이벤트 중 하나로 기록되며, 핵무기의 위험성과 핵기술의 엄격한 통제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핵확산금지조약(NPT)

핵무기를 개발한 미국이 태평양 전쟁 중 일본의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실제로 핵폭탄을 투하하였고 핵폭탄의 위력에 세계는 경악하게 됩니다. 이후 핵무기의 힘을 목도한 다양한 강대국들이 전후 핵무기 개발 및 보유를 경쟁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핵보유 경쟁은 냉전 시대 동안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과열되었으며, 이들 사이에서 핵무기 개발과 핵전쟁의 위험에 대한 긴장이 지속되었습니다.

 

이러한 핵무기 개발과 보유의 경쟁은 인류에게 큰 위협으로 다가왔고, 핵무기의 확산으로 인한 인류 멸망 가능성이 대두됨에 따라 1969년 핵확산금지조약(NPT)이 체결되었습니다. 이 조약은 비핵보유국이 새로 핵무기를 보유하는 것과 보유국이 비보유국에 대하여 핵무기를 양여하는 것을 동시에 금지하고 있습니다. 핵무기가 무분별하게 제조, 사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1968년에 유엔 총회에서 채택된 조약으로, 1970년 발효해 25년 후 존폐를 논의하기로 하였고 1995년에 무기한으로 연장되었다. 이 조약으로 핵보유국을 1967년 1월 1일 이전에 핵실험을 한 국가인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중국 5개국으로 동결하였습니다.

 

대한민국은 1975년 4월 23일에 가입했고, 북한은 당초 가입했다가 탈퇴하며 핵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현재는 인도, 파키스탄, 이스라엘, 남수단, 북한 5개국을 제외한 모든 국가들이 NPT에 가입한 상황이며, 남수단을 제외하면 모두 핵무기를 보유한 국가들이기도 합니다.

 

이 조약으로 국제적으로 이미 핵무기를 개발하고 보유하던 몇 개의 강대국을 제외한 국가들에게 핵무기를 개발하고 보유하는 것을 제한하였습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과 같이 강대국들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지 않은 나라들을 손쉽게 침범하는 것을 보며 몇몇 국가에서는 핵을 보유해야 한다는 쪽의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습니다.

 

결론

천제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세계 3차 대전은 어떤 무기로 싸울지 몰라도 4차 대전 때는 막대와 돌멩이로 싸우게 될 것이다'

비록 아인슈타인이 루스벨트에게 핵무기 개발을 요구하는 편지를 보냈음에도 개발 이후 핵무기가 인류 문명을 멸망 수준으로 몰고 갈 수 있음을 본 것입니다.

핵은 평화적으로 사용하면 인류에게 많은 혜택을 주지만 반대로 인류를 멸망으로 이끌어 갈 수도 있습니다.

지구에는 모든 인류가 평화롭게 살 수 있는 땅과 자원이 있음에도 정치적 또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언젠가 힘의 불균형으로 한 국가가 핵무기를 사용한다면 상대국의 대응으로 핵전쟁이 발발할 수 있습니다. 핵무기의 무서움을 깨닫고 모든 국가가 평화적으로 살아가길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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